한국델켐(주)

명예의 전당

한국델켐(주) 故 정찬웅 회장 약력

'대한민국 산업경제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故정찬웅 회장'

*출처 : 월간플라스틱스 2016년도 1월~5월호 특집 게재

현대 산업의 총아라 불리는 자동차부터 카메라, 핸드폰, 냉장고, 장난감, 면도기 그리고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들은 CAD/CAM을 거쳐 생산됩니다. 이렇게 CAD/CAM이 없는 산업사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그러한 우리나라의 CAD/CAM 보급의 산 역사이며 증인이자 선구자가 바로 한국델켐(주) 정찬웅 회장입니다.

경기기계공고 교사 시절의 청년 정찬웅

“우와-! 이게 다 뭐하는 기계예요, 선생님?” 

1982년 6월, 경기기계공고에서 때아닌 작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도 생소한 최신 기계와 장비를 보게 된 학생들은 신기한 눈으로 함성과 질문을 해대기 바빴습니다. 그 기계는 다름 아닌 당시 교육부에서 ‘첨단 산업기계의 기술교육을 통해 산업현장에 적응하게 한다.’는 취지 하에 CNC 같은 그 당시로서는 첨단 공작 기계를 경기기계공고와 서울기계공고 두 학교에 설치하여 지역의 공고생들과 교사 재교육을 위한 기계공동실습소를 만든 것입니다. 1978년 고려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청년 정찬웅은 당시 남들이 다 선호하고 월급도 많았던 대기업 입사 제의를 뿌리치고 교사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경기기계공고 교사로 5년째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 새로운 기계 장비를 접하게 되면서 먼 미래로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그가 맡았던 CNC와 이것을 움직이기 위한 CAM을 가르치면 칠수록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당시 사용했던 일본 화낙 업체의 장비로는 아주 간단한 모양을 가공하는 수준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복잡한 형상은 처리를 못했어요.”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다니며 알게 된 것이 바로 'CAD‘였습니다. “컴퓨터로 어떠한 복잡한 형상이라도 3차원 상태에서 정의를 해주면 그 데이터가 컴퓨터에 쌓여서 일일이 사람이 기억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그걸 잘 활용만 하면 된다.”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찾아내고 외쳤다는 ‘유레카’를 그도 외치는 순간이었습니다. 한번 머리에 꽂힌 건 뿌리를 뽑아야 직성이 풀렸던 정찬웅 교사는 이후 CAD/CAM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어디서 이에 대한 세미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만사를 제치고 쫓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성적으로 모은 자료를 가지고 정리해 나름대로의 교재를 만들었는데, 때마침 기회가 주어져 학생들이 아닌 공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CAD/CAM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었고 옆에 있던 경기공업개방대학(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에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2대 총장이었던 김호근박사로부터 그 대학에 국내에선 처음으로 CAD/CAM 과목을 개설했는데 막상 가르칠 사람이 없다며 강의 요청을 받아 1983년부터 84년까지 2년 동안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습니다.

8년간의 교사 생활을 접고 CAD/CAM 영업 사원으로

공고와 대학에서 실제 컴퓨터 없이 이론적으로 말로만 강의를 하며 실무적인 것에 목말라 하던 정찬웅 교사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온 것은 당시 CAD/CAM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던 한 회사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8년이란 교사 생활을 하루아침에 접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안정된 교사란 직업을 그만두고 왜 새로운 직업에 뛰어들려고 하냐면서 만류를 하였습니다. 1985년이었던 당시 CAD의 국내시장은 그야말로 치열한 각축장이었습니다. 국내 경기가 활황이었던 그때 설계자동화가 건축 토목에서 기계 전자산업으로 확산되는 추세였기에 무려 22개사가 CAD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회의를 느끼며 실무에 목말라 하고 있던 교사 정찬웅은 이때 과감히 치열한 CAD 영업에 몸을 던지며 입사 한 달 만에 금성사에 납품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처음에 영업했던 대기업들은 어느 정도 기술적인 경험이 있었기에 대화가 쉬웠지만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영업하다 보니 이건 완전 딴 세상이었습니다. 기술적인 것을 얘기해도 기본적인 용어에서부터 알아듣지를 못하고 CAD에 대한 인식이 너무도 부족했던 것입니다. 교사에서 직장인으로 이직을 하면서 이 분야에서 기술만큼은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던 정찬웅은 시간이 지나 영업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면서 아무리 기술이 좋고 뛰어난 제품이 있더라도 제대로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기술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영업방법을 정리한 것이 지금은 표준처럼 되어 있는 바로 BMT(Benchmarking Test) 기법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술과 영업의 두 가지를 접목한 기법으로 세워지고 아직까지도 한국델켐(주)의 근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 델켐 사장에게 “나한테 5만 파운드만 보내주시오”

정직과 신뢰를 기반으로 뛰어난 영업 실력 업계에서 인정받은 직장인 정찬웅은 여기저기서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되자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어떤 곳은 지금의 3배 월급을 준다고 하는데 만약 그곳을 가게 된다면 돈에 팔려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란 생각이 문뜩 들자 그는 ‘금형 설계부문에서 세계적인 회사를 만들어보자.’ 란 꿈을 꾸며 창업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창업을 할 만한 자금 여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내에게 ‘돈 좀 모아놓은 것이 있냐?’고 물어보니 돌아오는 건 핀잔뿐이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영국 델켐의 휴 험프리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나한테 5만 파운드만 보내주시오.”라며 당시 환율로 1억 원 정도 되는 거금을 투자하라고 얘기했습니다. “종이에 ‘델켐에서 5만 파운드 빌림. 정찬웅’ 이렇게 쓰고 사인해서 팩스를 보냈더니 다음날 돈이 들어왔어요. 허허허.” 지금 생각하면 쉽게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이 모든 게 사실인데, 당시 정찬웅 회장이 CAD/CAM 업계에서 어느 정도로 신뢰도와 능력 면에서 인정을 받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일화입니다.